
최근에 읽었던 책중 감명깊게 읽었던 '기도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일부입니다.
특새때만 기도하는 '척'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동판'받기위해서, 특새 '개근'만을 위해 기도하는 시늉만 냈던 저자신을 회개합니다.
회복 탄력성을 갖는 가을 특새 되게 하소서...
기도의 영이 없는 크리스천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안한다. 그리고 동시에 기도를 못한다. 기도를 못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우선 기도를 안한다는 것은 첫째로 기도하는 데에 시간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건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경건은 훈련이다. 연습이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생각, 삶은 주위 환경에 너무나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건에 시간을 내야 한다. TV를 많이보면 우리의 생각은 TV에서 본 것에 지배를 받게 된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의 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의 종이 된다"
성범죄를 짓는 사람들 음란한 야동을 많이 보다가 그것에 생각이 지배되어 그러한 범죄를 범하지 않는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말씀을 읽어야 말씀의 지배를 받고 기도를 해야만 우리의 기도의 영이 살아나고 기도의 영역 안에 하나님의 영역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기도하기에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 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직장인들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고 정말 쉴틈없이 일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하는 것 정말 힘들다.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 2002년에서 2004년까지 창원에서 유학준비 겸 영어도 더 익힐겸 무역관련 업무에 2 년정도 종사한 경험이 있다. 아침에 8시 20분까지 출근해서 저녁 7:20 분이 퇴근시간이었다. 토요일도 매주 근무했다. 오후 5:20 분이 퇴근시간이었다. 그런데 저녁 7:20 분에 잘 퇴근을 못했다. 보통 9 시쯤 집에 간 것 같다. 같이 지냈던 동료는 더 했다. 그는 매일 11시 넘어서 집에 왔다. 정말 돈버는 기계인 것 같았다. 치열하게 일한다. 근무시간도 길고. 정말로 딴 곳에 정신을 팔 겨를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당시에 집에와서 눕기 바빴던 것 같다. 업무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로 심신이 늘 피곤했다. 요즘은 주 5 일 근무를 하는 회사가 대부분인데 좀 나아졌는 지 모르겠다. 그 때 당시에 기도생활도 엉망이었고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잘 안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기도할 곳을 찾아 저녁에 헤매고 다닌 기억도 난다. 다행히 집근처의 좋은 교회를 알게 되어 기도하고 싶을 때에 그곳에 가서 기도할 수 있었다. 유학 다녀 온 후 우연찮게 8 년만에 그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어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따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그만큼 정말로 시간이 없다.
저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데 특히 여름에는 새벽 5시부터 논밭으로 출동하신다. 왜냐하면 아침 9시쯤부터는 해가 뜨거워서 일을 할 수가 없다. 올해 2026년 여름은 또 얼마나 더웠나? 말 그대로 폭염, 열대야가 여러 날 이어져서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한 밤 중에도 대도시는 콘크리트 열기가 식질 않아 시민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방해한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이기는 수 밖에 방법이 없다. 제가 아는 부부는 맞벌이인데 자녀가 둘이다. 그런데 회사에서 퇴근이 늦을 수 밖에 없는 데 일이 많아서 그래서 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야근을 한다는 것이다. 야근이 있는 날에는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말이다. 사정은 이해한다. 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하나님 영역 밖에서의 노동은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양면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발전시키는 문명은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삶의 편리를 가져다 주지만 역시 죽음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편리성을 가져다 주는가? 하지만 우리를 얼마나 얽어매고 죽음을 초래하는 가?
자동차, 산업혁명, 도시화, TV, 인터넷 등등 인류가 이룩한 문명들은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다.
우리의 삶의 생존이 걸린 이러한 생활이 옳지 않음은 우리 모두가 자각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데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다. 하지만 핑계될 수 없다. 이겨내야 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 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주인이 계시고 우리의 삶으로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현재의 삶은 아담적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 동산 안에서 아담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땀 흘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유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기도생활이 있는가? 없는 것 같다. 역시나 놀기 바쁜 것 같다. 여유가 있으면 또한 기도할 필요를 또한 못느낀다. 그냥 평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놀기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이 부분을 타협한다. 시간이 있든지 또는 없든지 간에 말이다. 시간이 있으면 노느라고 쉬느라고 기도하지 못한다.
사람은 참으로 답이 안 나오는 존재이다. 인간은 힘든 일이 찾아오면 힘들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죄지으며 평안하면 방심하여 쾌락과 죄악에 또한 쉽게 빠진다.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믿음인데 참된 믿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너무나도 처참한 모습이다.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힘든 일이 생기면 기도하기 보다는 염려하느라고 기도를 잊어버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기 보다는 쉽게 걱정, 염려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다. 반대로 삶이 평안해지면 기도의 필요를 잊어버리고 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이것, 저것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다 간다.
자신들은 분명히 그렇게 쓸모없고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의 생활을 보면 기도를 벗어난 모든 행위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깊은 단계에 들어간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하는 모든 일을 죄악시 여기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참담한 실체인 것 같다. 정말은 죽은 마른뼈나 마찬가지이다. 점점 내려가서 더 이상은 일어설수가 없는 영적 장애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로 까지 내려간다. 문제는 여기서 돌이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전에 회개하고 기도해야 하는 데 말이다. 영적인 탄성력의 범위를 벗어나면 안되는데 말이다. 어느선을 넘어가면 우리가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바로가 마음이 강팍했다”는 말이 총 20번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에 10번은 바로 스스로가 강팍했다고 하면 10번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로가 스스로 강팍케 하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서는 그가 마음을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대로 남겨두어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돌이킬 수 있을 때 온전히 돌이켜야 하겠다. 비신앙인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크게 2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돈과 쾌락을 쫓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인이라고 하는 크리스쳔도 그들의 삶의 방향과 모습이 점점 별반 다르지 않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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